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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비, 유럽 왕가의 할머니가 된 우크라이나 공주 « 키이우의 안느 » 이야기
작성자 : 관리자(gilles.kwave@gmail.com)  작성일 : 23.05.30   조회수 : 96
첨부파일 20230528_105647.jpg

 

키이우 시내에서 가장 산책하기 좋은 거리라면 야로슬라비브 발(YAROSLAVIV VAL STR ) 거리이다.


 



골든 게이트에서 시작하여 르비브스카 공원(LVIVSKA PARK)에서 끝나며 그 뒤편으로는 드니프로강과 포딜 지역이 한눈에 보이는 탁 트인 언덕 정상에 다다른다.



 

 

특히 이 구역은 프랑스 영향을 많이 받은 듯 연극당, 꽃집, 빵 가게, 카페, 식당, 와인 바들이 즐비하며 프랑스 대사관을 비롯하여 많은 대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 거리를 지나면서 항상 보게 되는 작은 소녀의 동상, 무언가 애처롭고 신앙심 깊은 듯한 모습으로 처음에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나 또 다른 시대에 학살당한 우크라이나 어린이를 추모하는 동상이겠지 했지만 호기심에 동상 밑을 읽어보니 불어로 적혀있다.

 

 

 


« ANNE de Kiev » 즉 « 키이우의 안느»이다.

 

우크라이나 프랑스 대사에 의하여 2016년 이곳에 세워지다.

 

키이우의 안느는 1031년 프랑스 왕위에 즉위한 앙리 1세의 3번째 왕비였다.



 



왕좌에 오르자마자 앙리 1세는 강력한 정당의 우두머리였던 그의 어머니와 형제 로버트에 맞서 무기를 들었고 결국 승리했지만, 주변은 항상 적들로 들끓었으며 특히 여자 복이 없었다.

 

그의 첫 부인은 신성 로마 황제의 딸 마틸다였으나 결혼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다. 두 번째 부인도 죽고 만다.

 

30대였던 앙리 1세는 왕위 계승자들을 얻기 위해 다시 결혼하기를 원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는 서방에서 강력한 왕국 중 하나였으며 그 명성은 유럽 전역에 퍼졌지만, 대부분의 유럽 왕실은 그에게 혼인의 문을 닫았다.

 

교회가 그동안 만연했던 왕족 간의 근친혼을 바로잡기 위해 7촌까지의 결합을 절대 금지하였다. 이전에는 왕들이 근친혼의 비참한 결과를 무시하고 영토 확장을 위해 결혼을 했으며 때로는 자신 조카와 결혼하기도 했다.

 





직간접적으로 프랑스 군주와 동맹을 맺지 않은 나라는 없었기에 근친이 아닌 공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절망한 앙리 1세는 약혼자를 찾기 위해 사절단을 먼 동쪽으로 보냅니다. 그가 첫 좋은 소식을 받는 데는 무려 5년이 걸렸다.

바로 키이우 대공 야로슬라프의 딸인 안느였습니다.

 

안느는 마케도니아 왕과 비잔틴 황제로 거슬러 올라가는 명문가 출신입니다. 그녀는 신중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구사했습니다. 그의 6명의 형제자매는 모두 성공적인 결혼을 했습니다.

 

한 명은 노르웨이의 여왕이고 다른 한 명은 헝가리의 여왕이며 그녀의 형제 중 한 명은 영국의 Harold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당시 종교의 차이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는 로마 기독교와 정교회 기독교가 1054년까지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고 아직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어머니인 스웨덴의 잉그리드로부터 안느는 우아함, 재치, 금발 머리, 관능적인 입을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안느의 미모가 멀리 콘스탄티노플까지 칭송된다는 말을 들은 앙리 1세는 갑자기 눈이 반짝입니다. 그는 당장 주교를 키이우에 보내서 안느 아버지에게 대신 청혼을 요청합니다.

 

당시에 서부 개방에 생각이 많았던 안느의 아버지는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그렇게 Anne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프랑스를 향해 상당한 지참금을 실은 마차를 타고 위험하고 먼 길을 떠납니다.



 



마침내 소문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약혼자를 만난 앙리 1세는 즉시 그녀에게 반했다고 합니다.

 

결혼 후 몇 년 동안 안느는 남편에게 미래의 필립 1세가 되는 필립을 포함하여 네 자녀를 낳아 주었습니다. 이전까지 필립(그리스 기원)이란 이름은 서유럽국가에서 사용되지 않았고, 처음이었습니다.

 

 

결혼 당시 앙리 1세는 43세, 안느는 25세로 큰 나이 차이가 있었고 결국 앙리 1세가 먼저 일찍 사망하자 안느는 필립 삼촌에게 필립 1세의 섭정을 맡기고 파리 근교 성으로 옮겨 가서 새로운 생활을 즐기게 됩니다.

 

해방된 젊은 과부 안느는 매우 활기차고 인기 있는 파티와 피로연을 자주 개최하였으며 남성 초대객들은 아름다움이 빛나는 여왕과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눈먼 남자 중에는 당시 프랑스에서 강력한 영주 중 한 명인 라울이 있었습니다.  안느도 같이 사랑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라울은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기에 아내에게 친정에 다녀오라고 한 뒤 숲 속에서 납치하여 가두어 버리고 실종신고를 하고 안느와 재혼합니다.

 

이 납치와 그에 따른 결혼은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교황 Alexander II는 라울에게 실종된 아내를 되찾도록 명령합니다. 라울은 교황의 명령을 거절합니다. 교황은 라울의 재혼을 무효로 선언합니다.

 

 



그러나 라울과 안느의 줄기찬 사랑에 교황도 국민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굴복하게 됩니다. 필립 1세도 어머니를 용서하면서 이들은 공식적인 부부가 됩니다.

 

1074년 라울이 세상을 떠나자 안느는 말년을 수도원 건축과 복원에 바쳤습니다. 그녀는 1079년에 사망했습니다. 프랑스의 왕뿐만 아니라 영국, 벨기에, 스페인, 스웨덴 군주도 모두 유럽의 첫 번째 할머니로 간주할 수 있는 이 여왕의 후손입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 공주 얘기까지 알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지만, 종전되고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 멤버가 되었을 때 그때는 유럽연합의 역사로 중요시될 수 있기에 알아두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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